외형만 화려한 서기관들[막12:35-44]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디자인’을 쉽게 지나칠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동일한 기능을 가진 제품들이라도 어떠한 모양, 색감, 재질로 만드느냐에 따라 그 제품의 가치는 매우 달라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동일한 공간이라도 인테리어의 설계에 따라 공간의 활용도와 느낌이 달라지고, 동일한 매장이라도 제품을 진열하고 배치하는 방식에 따라 매출이 달라지며, 동일한 의복과 액세서리라고 해도, 코디하는 방식에 따라 그것들을 착용한 사람의 인상이 확연히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대 기업들은‘디자인 사고(thinking)’‘디자인 경영’‘디자인 심리학’‘디자인 혁신’같은 개념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디자인의 개념은 공간이나 제품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적용이 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외모를 디자인하기 위하여 명품으로 치장도 하고, 성형수술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신분과 자격을 디자인하기 위하여 각종 스펙을 쌓습니다. 비록 외모 가꾸기와 스펙 쌓기가 서로 다른 것처럼 보여도, 인간의‘겉포장’즉‘대외적인 이미지’를 만든다는 점에서는 본질적으로 같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디자인의 활용에는 중대한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문제냐? 그것은 이러한 디자인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는 단지 이미지일 뿐, 실제 내용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각 사람의 겉포장이 그 사람의 진정한 실체를 다 보여줄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말씀을 보면 자신들의 신앙을 디자인했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즉, 이 사람들은 신앙의 알맹이보다는 겉포장에 치중했던 사람들입니다. 과연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향하여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요?

첫째. 겉포장이 내용물을 보장하지 않는다.

예수님과 성경의‘첫째 계명’을 놓고 토론하던 서기관들이 물러가자,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을‘속 빈 강정’에 불과하다고 지적하셨습니다.

비록 당시의 서기관들은 성경을 보급하고, 해석하고, 가르치던 성경 전문가들이었지만, 그들의 성경지식은 허점투성이였기 때문입니다. 그 예로, 당시의 서기관들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가‘다윗의 자손’이라고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그들은‘다윗의 자손’의 의미를 족보상의 혈통이라는 관점에서만 이해하였기 때문에/ 다윗왕이 그리스도보다 족보상 서열이 한참 높은 조상이 됩니다. 따라서 다윗의 권위가 그리스도의 권위보다 한참 높아지게 되는거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리스도의 권위가 다윗의 권위보다 훨씬 높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근거를 다윗이 지은 시편 110:1절에서 찾으셨습니다.“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
다윗이 그리스도를‘주님’이라고 불렀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는 다윗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분이라는 뜻입니다.

결국 당시의 서기관들은 자신들을 꽤나 유식하고 똑똑한 것처럼 포장했지만, 실제 그들은 영적으로 무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영적으로 무지한 서기관들에게서 배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깨닫기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 당시 서기관들의 ‘화려한 지식포장’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희생되었습니다.

당시 서기관들의‘경건한 모습’은 자신들의 추악한 죄와 탐욕을 감추기 위한 교묘한 위장술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서기관들은 어디서든 거드름을 피우며 고상한 척하고 다녔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보호하라고 지목하신 과부들을 등쳐먹는 악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중동사회는 아직도 철저한 남성중심사회입니다. 최근까지도 수많은 여성들이 수시로 폭행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때때로 가족과 이웃들에 의해 잔혹한 살해까지 당하지만, 법도 정부도 그들을 보호해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중동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과격한 이슬람교 때문이 아닙니다. 그 지역 남성들의 사고방식 자체가 철저히 남성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이런데, 하물며 2천 년 전에는 어떠했겠습니까? 그 당시에 남편을 잃은 여성들이 홀로 가정을 지켜내기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서기관들은 이 불쌍한 여성들을 협박하거나 교묘하게 속여서, 그들의 재산을 빼앗기 일쑤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토록 악랄했던 서기관들이 기도시간만 되면 180도 변했습니다. 그들은 아주 길게 기도함으로써 자신들의‘고상한 신앙’을 증명하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그렇게 장황한 기도로 자신들을 포장할수록 오히려 더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마가복음 12:40). 이시간 우리 스스로를 돌아봅시다. 우리는 어떤가요?

그리고 두번째로는 포장속의 내용물의 가치는 순도(純度)로 결정이 됩니다. 서기관들의 영적 문제점들을 지적하신 후,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사람들이 헌금하는 모습을 지켜보셨습니다.

당시의 성전에는 입구가 나팔모양으로 된 13개의 헌금함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성전에 들어오면 이 헌금함 속에 자신의 헌금을 넣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돈은 모두 금, 은, 구리/ 이와같은 금속으로 만들어진 동전이었으므로, 동전이 헌금함에 떨어지는 소리가 주변사람들에게도 잘 들렸습니다. 그래서 부자들이 많은 액수의 헌금을 쏟아 부으면‘촤르르 …’하는 요란한 소리가 났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묵직한 동전들이 헌금함에 쏟아지는 소리가, 부자들의 귓가에는 자신들을 향한 주변 사람들의 떠들썩한 박수갈채처럼 들렸을 것입니다. 이에 비하여, 가난한 사람들의 헌금이 헌금함에 떨어질 때에 들리는, 얇은 동전의 초라한 소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더욱 민망하고 부끄럽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예수님께서 지켜보시던 헌금함 앞에 한 가난한 과부가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불과 몇 백 원에 불과한 얇은 동전 두 닢을 바쳤습니다. 그런데, 조금 전에 예수님께서 서기관들을 책망하시던 말씀을 잘 기억해보십시오. 이 과부가 왜 이토록 가난하게 되었겠습니까? 바로 당시의 존경 받던 종교지도자들인 서기관들 때문이 아닙니까?

다시 말해,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가난한 과부를 보며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성전에 있던 사람들은 이 과부를 불쌍히 여기기는커녕, 이 가난한 과부의 초라함과 궁색함을 비웃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가난한 과부에 대하여 상식을 깨는 말씀을 하셨습니다.“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마가복음 12:43).
아마도 그 순간 제자들은 상당히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선생님, 뭔가 착각하신 것 아닙니까? 이 과부는 겨우 몇 백 원밖에 헌금하지 않았습니다. 아까 그 엄청난 동전 소리는 저쪽 부자의 헌금함에서 났던 소리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셈법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고 강조하셨습니다.“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마가복음 12:44). 여기에 나타난 예수님의 평가방식은 상대평가인 동시에 순도(純度)평가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 가난한 과부가 예수님으로부터 큰 칭찬을 받은 것은 단순히 매우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헌금했기 때문이 아니라,“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마가복음 12:44)를 바쳤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당장 전 재산을 털어 헌금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44절에서 강조되는 두 단어는‘모든’과‘전부’입니다. 이것은 앞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마가복음 12:30) 사랑하라고 하신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즉 이 과부는‘불순물이 전혀 없는 순도 100%’의 신앙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금이라고 다 같은 금이 아닙니다. 금제품의 가치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순도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이라고 해서 다 같은 순도와 가치를 지닌 것이 아닙니다. 마치 가짜 참기름이 냄새는 그럴 듯한데 속에는 불순물이 잔뜩 든 것처럼 어떤 사람은 겉으로는 매우 신앙심이 깊은 듯하지만, 실제 생활에 있어서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세상의 요구와 적당히 타협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거스르며 삽니다.

이것은 마치 서기관들이 사람들 앞에서는‘거룩한’척하며 길게 기도하면서도, 뒤에서는 불쌍한 과부들을 등치며 사는 사악한 협잡꾼에 불과했던 것과 같습니다. 반면에, 마치 오늘 말씀의 가난한 과부와 같이 겉으로는 볼품없고 가치 없으나, 하나님으로부터‘순도 100%의 정금과 같은 믿음’을 가졌다고 인정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편을 택하겠습니까? 겉포장은 화려하지만 속에는 불순물로 가득한 가치 없는 인생을 살겠습니까? 아니면, 겉포장은 좀 투박해도 순도 100%의 가치 있는 인생을 사시겠습니까?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평가는 상대평가이자 순도평가입니다.

교회의 핵심가치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핵심가치는 ‘하나님 사랑’과‘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겉포장만 화려한 사람이나 단체를 찾으시지 않습니다. 겉포장은 그 속에 가치 있는 내용물이 있을 때에만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화려한 겉포장의 유혹을 뿌리치고,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들로 가득 채울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